어떤 사람이 난폭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습니다. 다행히도 보험에 가입되어 차량수리와 병원 치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또 사고 나도 보험 처리하면 되니까 다시 난폭운전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불법과 난폭운전을 반복한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건강관리는 아예 하지도 않고 몸을 함부로 대하며 살다가 암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명의를 만나 기적같이 회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퇴원하면서 ‘나에게는 이 훌륭한 의사가 있으니 다시 암에 걸려도 의사가 고쳐줄 거야’라고 하면서 예전과 같이 몸을 함부로 대한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미련하고, 무모하고, 위험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공로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은혜라면, 더 크고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자가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더 많은 죄를 지어도 되겠네?’라고 하면서 죄 가운데 머물러 있곤 했습니다. 죄에 거한다고 표현한 ‘거한다’는 ‘에피메노멘’은 단순한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머물다, 고집스럽게 죄의 습관 안에 거주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은혜를 악용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그 사망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러주시며 값비싼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는 그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라고 반문한 후,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자답하면서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죽음의 특징은 단절입니다. 관계도, 법적 효력도, 경제적 권리와 의무도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합니다. 죽음과 동시에 모든 관계는 끊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세례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설명하는 세례의 중요한 의미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라는 의미와 ‘세례를 통하여 주님과 연합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 옛사람은 주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 세례는 원래 침례(浸禮)로 물에 완전히 잠기는 예식입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와 육체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던 옛사람은 세례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죽어야 하는데, 잠깐 기절만 했다가 다시 옛사람으로 깨어나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후에 더 옛사람의 생명력이 강해져, 더 자기 고집으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살아난 후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옛사람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에 보면 ‘합하여, 연합한’이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단순히 물에 잠겼다가 물에 들어가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옷감이 염료에 스며들어 완전히 연합하고 일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는데, 여길지어다(로기제스데)는 상업용어로 ‘정확히 계산하여 장부에 기록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미 계산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미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계산 끝났으니,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