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한번 이야기한 내용인데, 요즘 성도님들이 사회생활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식사할 때, 식사 기도를 하는 것은 거의 커밍 아웃에 준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나 회식할 때, 감사기도 드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물수건으로 얼굴 닦으며 짧게 기도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수저 놓으면서 들키지 않게 기도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점점 드러내어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드러내어 기도하는 것이 꺼려진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믿는 복음이 자랑스럽게 여겨지지 못한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복음은 자랑스럽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분명하지만, 세상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인식이 부끄러워서 자신이 신앙인임을 드러내기 꺼릴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바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고백의 찬양들이 있습니다.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복음밖에 없습니다” 이런 찬양들입니다. 문제는 우리끼리 모여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렇게 고백한대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자에 따라 거리끼는 것, 미련한 것(고전 1:23)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깨닫고, 유대인들이 강조하는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바울에게 감동을 주어 말씀을 깨닫게 하신 성령님은 1,500년 후 루터에게도 임하셔서 깨달음을 주시고,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이 말씀은 종교개혁가 마틴루터의 회심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루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 법률가로 성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던 중 폭풍우 속에서 벼락이 가까이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극적인 경험을 하고 두려움 가운데 살려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하고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되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엄격한 금욕과 기도, 그리고 고행을 통해 자신의 죄를 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사로서 루터는 더욱더 극심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두려움을 겪게 됩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이면서 성경을 연구하던 중 이 말씀을 깨닫고, 당시 가톨릭의 부패한 모습에 대항하게 되었습니다. 성직매매, 정치개입, 대성당 건축 자금을 위한 면죄부 판매, 이런 것들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말미암아’라는 전치사(ek)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칭의의 관점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이신칭의)고 해석할 수도 있고, 성화의 관점에서 믿음은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점전적인 여정으로 복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은 자라면 계속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삶의 방식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개혁신앙은 복음의 본질을 깨닫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삶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신앙, 믿음에서 벗어난 삶을 정리하고 믿음으로만 구원받은 것처럼, 믿음으로만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것이 개혁신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