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일반적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보면 이 교훈의 핵심은 구원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야기는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는 질문으로 스스로 답하게 하십니다. 율법 교사답게 정확히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율법의 핵심을 요약해서 답변합니다. 그러나 이 율법 교사는 율법을 알고는 있지만, 행함과 실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인정해주시면서도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여기에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했다고 한 것은 자기 기준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이 율법 교사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주시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1. 신앙은 지식보다 해석과 적용이 중요합니다. - 율법 교사는 지식에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해석과 적용, 실천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26절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는 질문은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합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해석이 잘못되고, 적용과 실천이 없으면, 그 지식은 오히려 오해와 편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2. 잘못된 편견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는 말씀과 신앙에 심각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라고 하는 전통 속에서 말씀을 보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였습니다. 저들의 이웃에 대한 개념은 자신들과 같은 민족, 같은 유대교 신앙을 가진 자로 한정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유대교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만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인들도 이웃에서 배제했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사라미라인이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돌려서 말할 정도입니다.
3.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 우리는 강도 만난 자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 상처받고, 스스로 회복될 수 없는 절망중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부정하다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당시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배척을 받으셨지만, 죄로 인해 찢기고 상한 우리를 치료해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제자는 이 일을 하는 자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듣고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행함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