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회 일로 어떤 장로님과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동차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단어를 붙여놓고 늘 그것을 보며 다닌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역지사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편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인디언 속담에도 “누군가를 평가하려면 그 사람이 신었던 신발을 신어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의 ‘용서하다’는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이 합하여 만들어진 한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심정과 같은 마음을 품을 때, 이해하게 되고 용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판 역지사지의 해석도 있습니다. (역)으로, (지)랄해야, (사)람은, (지)가 뭘 잘못했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역지사지, 이게 쉬운 것 같아도 현실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사소한 문제도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고, 상대방이 당한 것을 겪어보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역지사지입니다. 역지사지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집살이 호되게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혹독하게 시집살이시키고, 군대에서 고참에게 고생한 군인이 고참되면 후임에게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과거의 모습은 잊고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기 전, 애굽에서 노예였습니다. 성경에는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나그네로 들어갔다가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의 해방이라는 은총을 경험한 백성은 은총에 보답하는 감사한 마음으로 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은혜가 없어지면,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이 없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하고 싶어 하고, 성공하여 힘을 갖게 되면 그 힘을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이 과정에서 약자들에게 가혹하게 하기 쉽습니다.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했고,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나그네, 고아, 과부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저들에 대한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으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종속되는 상황에 빠질 수 있고, 마음을 나쁘게 먹으면 그들의 무력한 상황을 악용해 더 힘들게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애굽에서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자비와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듯,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독교는 기득권을 가진 종교가 아니라 세상에 책임을 다하는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