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교회는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감사는 받은 은혜에 대해 인사하는 도리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인간의 도리를 넘어 신앙의 고백임을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실 때,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보고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치유와 동일한 선언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열 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제사장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는 도중 깨끗함을 받아 나병이 나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반응이 9:1로 갈립니다. 나머지 아홉에 관한 이야기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말씀과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단순한 나병의 치유에 머무르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면서 구원의 은혜까지 경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1. 은혜는 변방에서 시작됩니다. - 오늘 본문의 배경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어딘가에 있는 마을 입구입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앗수르의 혼혈 정책으로 유대인들에게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이방 종교가 혼합되어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리심산에서 따로 예배드렸고, 종교적 갈등이 심화되어 적대감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는 철저하게 유대인들로부터 게토(Ghetto, 특정 집단이 사회와 격리되어 모여 살던 구역)화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병이라고 하는 아픔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거주하는 통합을 이루었고, 예수님을 보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정도로 은혜를 갈망했습니다. 나의 부족함, 나의 한계, 나의 문제는 은혜가 시작되는 배경이 됩니다. 감사는 은혜로부터 시작되는데, 은혜는 변방에서 시작됩니다.
2. 은혜의 증거는 순종에서 나타납니다. - 예수님은 저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났을 때, 아직 치유의 증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다가’가 중요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움직이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공로나 자격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호의이지만, 그것이 증거로 나타나는 것은 순종하는 자리입니다. 은혜가 임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3. 은혜는 감사로 완성됩니다. - 같은 은혜를 경험해도 어떤 사람은 당연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한 사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감사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άρις)와 어근을 공유합니다. 즉 받은 은혜를 표현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성찬을 뜻하는 영어 단어 ‘유카리스트(Eucharist)’는 ‘감사’를 의미하는 헬라어 ‘유카리스티아(εὐχαριστία)’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감사는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차별과 장벽을 뛰어넘습니다. 예수님께는 ‘건강하냐 나병환자냐, 정통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냐’만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이 모두 깨끗함 받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마땅히 감사해야 할 자들이 감사하지 않을 때, 그것을 책망하십니다. 과거를 잊고,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감사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감사할 때, 육체의 치유에서 영혼의 구원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