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믿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적 지식에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 삶을 맡기는 신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믿음은 화려하고 세련된 예배시간에 고백되는 찬양이나 기도가 아니라, 썩어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과 같이 확정된 절망의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정보로서의 신앙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미 죽어 장사지내고 있는 나사로를 살리신 내용입니다.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의 병세가 중해지자 예수님께 이 사실을 급히 알렸습니다. 예수님이 이 소식을 듣기만 한다면 한 걸음에 달려오시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그러시는듯 지체하셨고, 결국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야 오셨습니다. 이 자매들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셨겠나이다”라는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고,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확인시키며 이것을 믿느냐고 다시 물으셨고,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버금가는 완벽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진짜 믿음의 실상은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셨을 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 정도 수준일 수 있습니다. 막연히 믿는다고 여기며 살아왔지만, 정작 믿음이 요구되는 상황이 되면 믿음 없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다는 현실과 죽은지 나흘이 지나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는 절망 앞에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입술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죽음과 같은 현실, 나흘이라고 하는 절망 앞에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무기력하게 무너져내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약한 믿음은 돌문을 옮기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돌문을 옮겨놓기만 하면 다시 살아나 나오는 나사로를 볼 수 있음에도, 우리는 그 문을 옮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돌문을 열어놓기만 하면 나사로가 살아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을텐데, 죽으면 끝이라고 먼저 결론을 내려놓고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열어보나 안보나 뻔하다는 불신이 부활의 능력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무덤문을 열기 위해서는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동의했고, 사람들은 돌을 옮겨놓았습니다.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모두가 죽은 줄로만 알았고,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얼굴도 수건에 싸여있었습니다. 염을 한 상태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고, 나사로는 부활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마르다의 모습은 우리의 가식적인 신앙이 탄로나는 것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영적 각성을 일으키는 불편한 진실이 되어야 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경계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나흘 된 송장과 같지는 않은지요, 죽음의 공간인 무덤을 막고 모든 희망과 단절된 돌 문과 같지는 않은지요. “돌을 옮겨 놓으라. 나사로야 나오라” 이 음성을 믿음으로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