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힘이나 능력을 나타낸다면 사람들은 그 비결을 궁금해할 것입니다. 분명히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는 성전 미문 앞에 있던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일어나 걷게 한 사건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구걸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 사람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했던 설교는 사두개인들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3:15)”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죽인 생명의 주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하니 그냥 묵과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4장에 오면 사두개인을 중심으로 한 성전 관계자들이 공회에서 재판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어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4:2)”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붙잡혀 공회의 재판을 받는 내용입니다. 공회에서 심문하는 최대 쟁점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0절)” 베드로의 증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고 천명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에도 이르게 되고, 예수 이름으로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 걷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이름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고, 예수 이름을 걸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국가대표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경기에 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살아가지만, 나를 통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사는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주술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이 나에게서 나타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고,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하게 증인이 되게 합니다. 아무리 가두고 협박해도 굴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것을 자랑합니다. 은과 금으로 대표되는 돈과 권력, 인기와 평판을 의지하고 자랑합니다. 사두개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 권력을 의지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가두고 협박하고 매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적인 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주지도 못합니다. 우리를 일어나 걷게 하실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