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양하지만, 성경적 역사관은 늘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와의 투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 하셨고, 세상 주관자인 악한 영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하나님 나라에 반역하는 세력을 확장해왔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직 종전된 것도 휴전된 것도 아닙니다. 곳곳에서 국지전이 일어나듯, 우리 삶의 현장에서 영적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적전쟁의 지형은 늘 밀리고 미는 치열한 전투와도 같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승전소식을, 누군가에게는 패전 소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1-6절은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오고, 7-13절은 배척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역으로 지경을 넓히시는 모습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가버나움에서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신 달리다굼의 기적을 베푸신 후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공생애를 위해 고향을 떠난 후 랍비처럼 제자들을 대동하고 고향을 방문하여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탁월한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두 사람의 증언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신원이 밝혀집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이 비하와 조롱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했습니다. 사생자를 연상케 하려고 어머니의 이름인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했고, 천한 직업인 목수의 집안임을 부각하려는 의도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형제와 누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출신을 문제삼았습니다. ‘아니냐, 아니냐, 아니하냐’라는 반복적인 말투는 고의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정상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고향이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여 사역의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열두 제자를 전도여행에 파송함으로 새로운 사역의 국면을 열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주신 것과 금지한 것이 있습니다. 주신 것은 전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권능과 은사입니다. 반면 금지한 것이 있습니다. 여행을 위해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물품들은 소유를 금지했습니다. 주님께는 대안이 있으셨습니다. 순회전도자로 사역하는 동안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할 수 있도록 예비하신 것입니다. 혹여나 영접하지 않는 자가 있어도 상처받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들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배척당하는 상황에서도 복음은 전파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불필요한 선입견과 편견은 올바른 판단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영적 전쟁을 위해 파송 받은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세상에서 이기는 힘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를 영접하지 않아도 상처받지 말아야 합니다.